이 태을암은 태안읍 동문리에 자리한 태안의 진산(鎭山)인 백화산 중턱에 건립되어 있는데. 창건연대(創建 年代)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리고「태을암」이란 명칭은 국조(國祖)인 단군영정(檀君 影幀)을 안치(安置)시켰던 태일전(太一殿)에서 연유되었다는 설이 있으나. 이를 실증(實證)할 수 있는 문헌이 없으니 신빙성이 희박하다. 태일전은 태안마애3불이 있는 위쪽 약 200미터 지점에 있었다고 전하나 건물은 이미 없어지고 지금은 그 터만 남아 있다. 또한 이 태을암의 대웅전(大雄殿)에 안치된 불상은 중앙에 석가여래(釋迦如來)·좌측에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우측에 석가여래(소형)를 배열해 놓았는데, 이는 석가삼존(釋迦三尊)의 형식도 아니고 또한 협시불(脇侍佛)로 석가여래를 배열해 놓은 것도 매우 이례적(異例的)인 보기 드문 일이다. 이 태을암은 지난 1962년 10월 1일에 전통사찰(傳統寺刹)제40호로 등록되어 현재 관리 중에 있다.
이 내용에서 보는바와 같이 설립(設立)연대는 알 수 없으나 재중수(再重修)에서 오중창(五重創)까지는 햇수(年代)가 명기(明記)되어 있었다. 재중수가 영락19년(1421)에 실시되었고, 3중수가 강희29년(1690)에 이루어 졌으니, 재중수에서 3중수까지 무려 269년이 지났으며, 4중수가 도광11년 (1831)이니, 3중수에서 4중수까지 141년, 그리고 5중수가 대한 광무10년(1906)에 실시되었으므로, 4중수에서 5중수(重修)까지 75년이 걸린 셈이다.
또한 지난 1983년에 개축하였으므로 이를 제6중수로 본다면, 5중수에서 6중수까지 모두 562년이 되므로 이를 평균해 보면 약 112년 간격으로 한 번씩 중수한 셈이다.
그러므로 재중수를 실시한 영락 19년으로부터 100여년을 소급(遡及)해서 생각해 볼 때 홍주사의 창건 연대를 고려 말엽(高麗 末葉)인 13세기 말에서 14세기 초엽으로 추정해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그러나 서산군지(瑞山郡誌)에 따르면 홍주사는 백제 구수왕(百濟仇首王)9년(222)에 흥인조사(興仁祖師)가 창건한 것이라고 하는데 이는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인도(印度)에서 발생한 불교가 우리나라에 전래된 것은 고구려(高句麗)의 소수림왕(小獸林王)2년(372)에 전진(前秦)의 순도(順道)가 불상(佛像)과 경문(經文)을 가지고 입국(入國)한데서부터 시작되는데, 백제(百濟)는 이보다 10년 뒤 성왕(聖王)때에 들어와 크게 발전하였다. 이 같은 백제(百濟)에 불교가 전래된 것이 서기 384년인데, 흥주사(興住寺) 창건이 백제 구수왕 9년이라면 이때는 서기 222년으로서, 백제에 불교가 들어오기 전의 160여년 전에 이미 흥주사가 세워진 것으로 되어 있으니, 이는 억설(臆說)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불교 공인 이전에 절을 세웠다기 보다는, 민간에서 신앙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 오히려 합리적일 것이다. 현재 흥주사의 대웅전(大雄殿)에 안치된 불상은 중앙에 석가여래(釋迦如來)를 비롯하여 좌측에 아미타불(阿彌陀佛) 그리고 우측엔 대세지보살(大勢志菩薩)로 이루어졌는데, 이것도 앞의 태을암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석가3존의 형식도 아니고, 또한 협시불(脇侍佛)로 아미타불을 배열해 놓은 것도 보기 드문 매우 이례적(異例的)인 형식이다.
이 흥주사는 지난 1962년 10월 1일 전통사찰(傳統 寺刹) 제46호로 등록되어 현재 황기호 주지(住持)가 관리하고 있다.
이 태국사는 근흥면 정죽리의 안흥성내 성동산(城東山)에 자리하고 있는데, 창건연대( 創建 年代)는 미상(未詳)이다. 그러나 이 태국사의 창건을 둘러싼 여러 가지 설화(說話)가 전하여지고 있는데, 일설에 따르면 조선조(朝鮮朝)의 세종대왕(世宗大王)때 태안부사(泰安府使)의 꿈에 안흥항(安興港)의 바닷가에 상자(箱子)하나가 떠나려와 있으니, 즉시 이를 가져다 잘 처리하라는 내용이었다. 꿈에서 깬 부사는 반신반의(半信 半疑 )하면서 아침 일찍 바닷가로 내려가 주위를 살펴보니, 현몽(現夢)한 대로 상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금불상을 싼 보자기에는 기원 태평 국운(祈願 泰平 國運)이라 쓰여 있었다. 이를 보고 기이(奇異)하게 여긴 부사는 이 내용을 즉시 국왕(國王)께 상주(上奏)하니, 국왕께서 특명을 내려 승려(僧侶)를 현지에 파견케 하였다. 왕명(王命)을 받고 현지에 내려온 승려는 곧 터를 잡아 절을 세우고 명칭(寺名)을 보자기에 쓰여 있는 태평 국운에서 태(泰)와 국(國)자를 따라 태국사(泰國寺)라 명명하고 금불상을 안치(安置)하니 이것이 오늘의 태국사라는 것이다.
여하간 이 태국사는 다른 일반사찰(一般 寺刹)과는 틀리는 점이 있다. 서산군지(瑞山郡誌)에 따르면「태국사는 국란이 있을 때 주승이 수막대장의 명을 받아 수군이 있는 18읍의 각 사찰의 승군을 지휘할 수 있는데, 이때의 군사상의 직권은 첨절제사와 같다」고 하였다. (泰國寺 往昔國有亂命主僧以守幕大將號令舟師在十八邑之各寺刹僧軍以指揮之當此時軍事上制裁權能與僉使同一)
또한 일설에 의하면 이 태국사는 우리의 국조(國祖)인 단군(檀君)의 영정(影幀)을 안치하고 안흥항을 통해 내왕(來往)하는 중국사신(明國史臣)의 안전항해(安全航海)를 빌었다고 하는데 이는 모두 믿기 어려운 억설(臆說)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가하면 태국사는 백제 무왕(百濟武王) 34년에 창건되었는데 고려 공민왕(高麗恭愍王)때에 폐사(廢寺)되어 100여년 내려오다 조선조(朝鮮朝)의 세종대왕 2년(1420)에 재건(再建)되어 오늘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같이 태국사의 창건설이 구구한데 이를 입증(立證)할 수 있는 실증사료(實證史料)가 없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그러나 여기서 하나 흥미를 끄는 것은 앞에서 본 태안부사의 현몽에 따라 세종대왕 때(1439) 태국사를 지었다는 것과, 또한 세종대왕 2년(1420)에 태국사를 재건했다는 설인데, 이를 연대 차이로 보면 무려 19년의 거리가 있으나, 같은 세종시대라는 점에 유의 하여 고 찰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 태국사는 그동안 사찰답지 않게 초라한 초가집으로 명맥을 이어오다 지난 1982년에 원통전(圓通殿)을 신축(新築)하고 말끔히 가꾸어 놓으니 이제 제법 사찰다운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이「원통전」이란 현판에「同冶十一年壬申五月一日)」이라 기록되어 있는데, 동치(同冶)란 중국(中國)의 목종(穆宗) 연호로서 우리 나라의 고종(高宗)9년 (1872)에 해당된다.
그런데 이 고종 9년인 서기 1872년이란, 태국사의 창건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중창 연대(重創年代)로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왜냐하면 앞에서 언급한 승군(僧軍)운운 등으로 미루어 보아 태국사의 창건을 임진왜란(壬辰倭亂) 이전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 같다.
현재 태국사의 원통전에는 중생(衆生)을 구하기 위해 33가지 몸으로 나타난다는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 안치되어 있으며, 또한 이 절은 지난 1962년 10월 1일에 전통 사찰 제47호로 등록되어 현재 남면우(南面佑) 주지가 관리하고 있다.
이 복성암은 태안읍 삭선리 6-34에 위치해 있는데, 창건 연대(創建年代)는 미상이다.
그러나 일설에 따르면 고려 말엽 (高麗末葉)에 창건되어 매우 번창 했었다고 한다. 한창 번창했을 때는 절구통이 무려 15개가 사용되었다고 하니, 좀 과장된 느낌이 없지는 않으나, 이는 단적(端的)으로 절의 규모가 웅대(雄大)하였음을 말하여 주는 것이다.
이렇게 웅대했던 복성암이 조선조(朝鮮朝)에 들어오면서 숭유억불(崇儒抑佛)정책으로 인하여 사세(寺勢)가 점점 약화(弱化)되어, 마침내 폐사위기(廢寺危機)에 놓이게 되었는데,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1950년 6.25동란(動亂) 때 불타버리고 말았다.
그후 10여년 내려오다 지난 1961년에 다시 이곳에 초라한 초가집을 짓고 불사(佛事)를 시작하여 그 명맥을 이어오다, 1971년에 지금의 주지(住持)가 우람한 대웅전(大雄殿)을 신축(新築)하고 포교(布敎)에 최선을 다하니 사세(寺勢)가 번창하여, 현재 경향 각지(京鄕各地)에서 많은 불도(佛徒)들이 운집(雲集)하고 있다.
현재 복성암(福成庵)의 규모를 보면 대웅전과 요사(寮舍) 그리고 산신당(山神堂)으로 이루어졌는데, 대웅전에는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좌측에 관음보살 우측에 대세지보살이 배열되어 있다.
이 불상(佛像)의 배열 실태를 보면 석가삼존(釋迦三尊)의 형식이 아닌 매우 이례적(異例的)인 배열 형식인데, 물론 각 사찰의 사정에 따라 다르겠지만 원칙으로는 석가여래(繹迦如來)를 안치하면 협시불(脇侍佛)로 좌우에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을 배열해 놓는 것이 합리적인 것이다.
(현재 전통사찰 등록을 신청 중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