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안흥진성은 근흥면 정죽리에 자리하고 있는데, 조선조(朝鮮朝)의 제17대 효종(孝宗) 6년(1655)에 축성(築城)된 것이다.
축성 목적은 국토 방위였으나, 이곳에 축성하게 된 동기를 살펴보면, 경기사인(京畿士人) 김석견(金石堅)이 군왕(君王)께 상소하여 안흥진성의 축조를 청원하니, 군왕께서 직접 지경연사(知經筵事)인 이후원(李厚源)을 불러 안흥진성 축조의 필요성을 하문(下問)하였다.
이에 이후원은 주저치 않고 이곳의 지형이 해중(海中)으로 약 10여리쫌 돌출하여 있는 천연적인 요충지(要衝地)이므로, 이곳에 석성(石城)을 축조하여 군대를 주둔시키고 호서(湖西)의 양곡(糧穀)을 비축(備蓄)하여 두면 안으로는 강도(江都)의 표리(表裏)가 되고, 밖으로는 호령(湖嶺) 지역을 공제(控制)할 것이라고 진언(進言) 하였다.
이 말을 들은 군왕께서는 즉시 충청감사(忠淸監司)에게 하명하여 안흥진성을 축조케 하니, 태안(泰安)을 비롯하여 인근의 서령(瑞寧) 해미(海美) 덕산(德山) 예산(禮山) 당진(唐津) 면천(沔川) 홍주(洪州) 결성(結城) 보령(保寧) 남포(藍浦) 서천(舒川) 한산(韓山) 임천(林川) 홍산(鴻山) 청양(靑場) 청주(淸州) 충주(忠州) 등지(等地)의 18개 읍민(邑民)이 이에 동원 되었다.
이같은 과정을 거쳐 무려 10여년만에 축성된 안흥진성(安興鎭城)은 240년간 내려오다, 조선조(朝鮮朝)의 고종(高宗) 31년(1894) 동학혁명(東學革命)때 성내(城內)의 건물이 일부 타버리고, 이에 따라 성곽은 자연히 폐성되고 말았다.
그후 광무(光武) 5년(1901)에 일부 남은 건물을 뜯어다, 태안군청과 그 부속 건물을 지을 때 사용하였는데, 안흥진성의 규모를 살펴보면, 동헌(東軒)·책실(冊室)·내아(內衙)·내관청(內官廳)·외관청(外官廳)·비자청(婢子廳)·막비청(幕裨廳)·중방청(中房廳)·감관청(監官廳)·통인청(通引廳)·급창청(及唱廳)·관노청(官奴麝)·사령청(使令廳)·헐수청(歇守廳)·작청(作廳)·형리청(刑吏廳)·장교청(將校廳)·대도안청(大都案廳)·교련청(敎練廳)·능로청 (能櫓廳)·장대(將臺)·영사대(永思臺)·연습대(練習臺)·흥학대(興學臺)·객사(客舍)·홍살문(紅撒門)·오리정(五里亭)·대변정(待變享)·육모정(六模亭)·팔모정(八模亭)·검소루(劍嘯樓)·폐문루(閉門樓)·제승루(制勝樓)·망해루(望海樓)·대장막(大將幕)·중군막(中軍幕) 등으로 이루어졌으며, 또한 성의 동문(東門)을 수성루(守城樓)·서문(西門)을 수홍루(垂虹褸)·남문(南門)을 복파루(伏波樓) 그리고 북문(北門)을 감성루(坎城樓)라 불렀다.
이같이 규모가 매우 컸던 안흥진성이었지만, 지금은 시설물 하나 남아있지 않고 다만 성내에는 민가(民家)20여 채가 들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서문 쪽 일부가 파괴되어 통로로 사용되고 있을 뿐, 성곽의 윤곽이 대부분 그대로 남아 있어 이를 보수하면 원형(原形)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안흥진성은 태안군내에 남아 있는 여러 성중에서도 원형에 가까운 가장 큰 성으로서 지금도 원근 각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들고 있는 유일한 성이다.
그리고 이 안흥진성의 둘레는 1,568미터 높이 3.5미터에 이르는 석성(石城)인데, 지난 1976년에 도기념물(道紀念物) 제11호로 지정되어 현재 관리중에 있다.
또한 이 성의 본래의 명칭은 안흥진성(安與鎭城)인데, 오랫동안 내려오면서 호칭의 편의상 안흥성으로 굳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소근포진성은 소원면 소근리(所遠面所斤里)의 해안가에 자리하고 있는데, 조선조(朝鮮朝)의 중종(中宗) 9년(1514)에 축조(築造)된 석성(石城)으로서 그 둘레는 656미터이며 높이는 3.3미터이다.
이곳에 축성하게 된 동기는 침입해 오는 외적을 막기 위해서였다. 특히 고려말기(高麗末期)부터 더욱 심하게 나타난 왜구(倭寇)로 인하여 연안(沿岸)의 주민들이 약탈(掠奪)을 당하고 심지어 피살(被殺)되는 등 그 참상(慘狀)은 형언할 수 없었다.
고려(高麗)의 31대 공민왕(恭愍王) 22년(1373)에는 왜구의 침입이 몹시 혹독하여 태안 군수가 겨우 한 두명의 아전을 데리고 서산군에 붙임으로서 결국은 태안군이 폐군의 비운을 맞게 되었다.
왜구의 침입으로 말미암아 하나의 군이 폐군되었다고 하는 것은, 그들의 침략상(侵掠狀)이 잔악(殘惡)하였음을 여실히 입증해 주고 있는 것이다.
태안군이 폐군된지 무려 66년 뒤인 세종(世宗) 21년(1439)에 새 공관(公館)을 짓고 김흔지(金炘之) 군수가 부임 하였다.
그후 75년에 소근포진성이 축성 되는데, 이는 태안군이 폐군된지 무려 141년 뒤에 이루어진 것으로서 해적(倭寇)의 방어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고려 말기인 1350년대 초기부터 1380년대 중엽까지 무려 10여회에 걸쳐 왜구의 침입을 받은 것이다. 이 소근포진성은 당시의 유일한 태안군의 진성으로서 외적 방어에 최선을 다하여오다, 1894년 동학혁명 때 폐성되었다.
현재 성벽(城壁) 일부만 남아있고 또한 성내에는 대여섯 채의 민가(民家)가 지난날의 역사의 흔적을 외면한채 한가롭게 들어서 있다.
그리고 이 소근포진성은 소근포에 축성된 성이므로 편의상 소근포란 지명을 붙이어 그대로 소근포진성이라 호칭하였는데, 시간의 흐름에 따라 주민들 사이에선, 이를 줄여서 통칭 소근진성 또는 소근성이라고 한다.
이 태안읍성은 태안읍 남문리에 자리하고 있는데, 조선조(朝鮮朝)의 태종(太宗) 때(1401 ~ 1418)에 축성된 석성(石城)으로서, 그 둘레는 1,561尺(473미터)에 높이 122尺 (3.6미터) 이다.
성안(城內)에는 4개의 우물이 있었고 또한 성에는 동서남북으로 4대문이 있었는데, 이 중 동남문만이 사용되었으며, 북서문은 얼마후에 폐쇄 시켰다.
현재 태안군내에는 여러개의 성이 있는데, 이 중 대부분이 산성(山城)으로 축조되었지만 태안성은 읍성(邑城)으로 되어 있는 것이 특이하다.
그리고 이 태안읍성 역시 동학혁명(東學革命)때(1894) 폐성되었는데, 그러나 다행히도 구 군청 뒤쪽 민가 근처에 일부의 성벽(城壁)이 그대로 남아 있어 태안읍성(泰安邑城) 연구의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이 백화산성은 태안국민학교 뒤에 우뚝 솟아 있는 태안의 진산(鎭山)인 백화산 정상에 축조된 석성(石域)인데, 그 둘레는 2,042尺(619미터)에 높이 10尺(3.03미터) 이다.
이 산성은 고려(高麗)의 충렬왕(忠烈王)13년 정해(丁亥)에(1287) 축성되었는데, 성내에는 2개의 우물이 있었으며, 또한 봉수대(烽燧臺)가 설치되어 있어 동쪽으로는 서산의 북주산(北主山), 남쭉으로는 부석면의 도비산(島飛山)과 연락을 취했다.
그리고 이 백화산성이 언제 폐성되었는지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알 수 없으나 현재 태을암의 동쪽 약 100미터 지점에 성벽의 일부가 남아 있어, 산성 연구에 도움이 될 것 같다.
태안읍지(泰安邑誌)에 따르면, 축성한지 이미 오래되어 현재는 퇴락(頹落)되어 있으나, 지세(地勢)가 사면이 절벽으로 되어 있어 사람이 발붙이기 어려운 곳이라 했다.
이와 같이 백화산성을 험난한 지세를 잘 이용하여 축성하였으므로 외적(外敵)이 접근하기 어려운 요새지(要塞地)였다.
그리고 이 백화산성은 소성현(蘇城縣) 때의 태안읍성(泰安邑城)으로 사용되기도 했으며, 또한 태안군내 성곽중에서 제일 먼저 축성된 것이다.
이 토성산성은 근홍면 수룡리(近興面水龍里)의 토성산(일명 테뫼산)에 축조된 산성을 일컬음인데, 축성 연대는 알 수 없다.
이 성의 규모를 살펴 보면 둘레가 590미터이고, 높이가 3.3미터로 이루어진 석성(石城)인데, 정확한 축성 연대는 알 수 없으나, 태안반도의 특수성 등으로 미루어 보아 16세기 초엽으로 생각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이 무렵에 소근포진성이 축성(1514)되는데, 이는 왜구의 침입으로 인하여 태안군이 폐군(1373)된 뒤의 일이었으므로, 토성산성도 이 때 외적의 방어에 대비하기 위해 축조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 토성산성은 동학혁명 때(1894) 출병(出兵)하기 위해 동학군(東學軍)이 집결했던 곳으로 역사적 의의가 매우 큰 산성이다.
동학혁명 때(1894) 폐성된 이 토성산성은 그동안 90여년 내려오면서 성벽이 허물어지고 퇴락되어 지금은 부분적으로 그 윤곽만 남아 있을 뿐이다.
이 두야리산성은 근홍면 두야리(近興面斗也里)에 축성(築域)된 석성(石城)을 일컫는 것인데, 그 둘레는 약 600미터이다.
이 산성의 정확한 축조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이 지역이 왜구의 출몰이 심하였으므로 이에 대비하기 위해 축성된 것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러므로 앞의 토성산성(이 토성산성의 축성, 연대도 정확성이 없지만)이 만들어질 무렵에 이 두야리산성도 축성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또한 이 산성이 언제 폐성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지금도 부분적으로 성벽의 잔흔이 남아 있어 성곽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이 양잠리산성은 남면 양잠리(南面 兩潛里)에 자리한 토성(土城)인데, 그 윤곽을 살펴보면, 둘레 약 270미터 높이 3.3미터에 이르는 비교적 작은 규모의 토성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성이 언제 축조 되었다가 언제 폐성 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지금도 일부 지역에 성벽의 잔흔이 남아 있어 토성 연구에 놓은 자료가 되고 있다.
이 한의산성은 태안읍 장산리(泰安邑長山里)와 소원면 시목리(所遠面枾木里)의 경계에 자리한 석성(石城)을 말함인데, 그 둘레가 200미터에 지나지 않는 비교적 소규모의 산성이다.
이 한의산성 역시 언제 축성 되었다가 언제 폐성 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아직도 일부 지역에는 성벽의 흔적이 남아 있음을 엿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