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남문리5층석탑은 태안읍 남문리 435~1에 위치하고 있는데, 건립 연대(建 立年代)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이 탑의 구조를 살펴보면 기단(基壇)은 신라 양식(新羅樣式)과, 옥개 석(屋蓋石)은 백제(百濟)의 기법(技法)이 가미(加味)되어 있으나 전체적인 탑의 맵시로 보아 고려시대(高麗時代)의 후기 작품으로 보는 것이 가장 합리적일 것 같다.
또한 이 5층석탑은 태안군내에 실존하는 석탑 중에서 비교적 손상이 심하지 않은 것으로, 고려 시대의 불적(佛跡)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믿는다.
이 남문리5층석탑은 지난 1975년 2월 5일에 문화재 자료 제201호로 지정되어 현재 관리중에 있는데, 높이는 약 5미터에 달하는 화강석(花崗石)으로 이루어진 석탑이다.
몇년 전 밭을 경작할 때 기와 조각이 출토되었다고 전한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옛날 이곳에 절이 있었음을 말하여 주고 있다.
또한 이 지역에 거주하는 촌로(村老)들의 구전(口傅)에 따르면 옛날 이곳에 대규모의 절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석탑에서 약 20여미터 서북(西北)쪽의 민가(民家)앞 나무 밑에서 소형(小形)의 석불(石佛)을 박춘석씨가 지난 1975년에 발견한 일이 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이곳에 절이 있었음을 입증해 주는 것이다.
이 흥주사3층석탑은 태안읍 상옥리(泰安邑 上玉里)산 1154에 위치한 흥주사 대웅전(大雄殿) 앞의 3층석탑을 말하는 것이다.
이 3층석탑이 언제 조성(造成)된 것인지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흥주사의 창건 시기(創建時期)가 고려 말엽(高麗末葉)이므로, 이 무렵에 세워진 것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이 석탑은 상층 부분이 파손된 것을 다른 잡석(雜石)으로 무리하게 보완(補 完)하였기 때문에 미관상 볼품이 없다.
그리고 이 탑은 지난 1973년 12월 24일 충청남도 지정문화재 제28호로 지정을 받아 현재 관리중에 있는데, 높이는 약 3미터로서 화강석(花崗石)으로 되어 있다.
이화산(170미터)분 원북면 마산리에 위치하고 있다. 원이중학교의 맞은편에 있는 이 산의 중턱에 절터(廢寺址)가 있는데, 나무숲에 묻히어 보이지 않는다.
이 절터 바로 밑에 3층석탑이 있는데, 이는 완전한 본래의 석탑이 아니라 해체 된 것을 무리하게 옥개석만 올려 놓은 볼품 없는 일부 훼손된 탑이다.
그런데 이 탑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런대로 기단부와 탑신부는 있으나 탑두부만 보이지 않는다. 실은 탑신부에도 2.3층 사이에 있어야 할 옥신이 없고 옥개석만 포개져 보기 흉하게 놓여 있다.
탑의 높이는 하대갑석에서 3층의 옥개석 상단까지 150cm이며, 그리고 기단부 중에서 지대석과 하대석은 보이지 않고 하대갑석에 중석받침이 없이 상대 중석이 있고, 이 위에 상대갑석이 놓여 있는데, 이 갑석 위에 옥신괴임이 없이 옥신만 놓여 있고, 이 옥신 위에 1층 옥개석이 얹혀 있다. 또한 이 옥개석 위에 옥신 없이 두 개의 옥개석만 포개져 있다.
그러나 현존의 상태에서 탑의 규모를 살펴보면, 하대갑석의 크기는 가로 130cm, 세로 102cm, 상대중석 가로 49cm, 높이 29cm, 상대갑석 가로 95cm, 세로 95cm, 두께 11.50cm의 정4각형이고, 1층 옥신은 가로 42cm, 높이 33cm로 이루어진 화강암의 석탑인데, 신라 양식이 가미된 고려후기의 탑으로 추정된다.
현재의 이 석탑은 해체된 것을 억지로 맞추어 놓았기 때문에 미관상 매우 볼 품없이 되었지만 이를 다시 손질하고 2.3층의 옥신을 보완한다면 아름다운 석조 예술의 본래 모습을 되찾게 될 것이다.
애국지사 이종헌(李鍾憲)은 고종(高宗)27년(1890) 4월 9일 태안군 안면읍 승언리 91번지에서 규삼(奎三)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일찍부터 고향에서 한문을 배우고 있었는데, 마침 승정원(承政院)의 동부승지 벼슬을 지내던 김병년(金炳秊)이 안면읍 승언리로 낙향하여, 신교육을 통해 조국광복을 꾀하고자 1906년(광무 10) 12월에 광영신숙(廣英新塾)을 세웠다.(신교육 과정 이 적용되었으므로 통칭 학교라 호칭했다)
이때 이종헌은 한문 공부를 그만두고 새로 세운 광영학교 고등과에 입학하여 1918년 본교를 졸업하고 이에 모교의 교사로 취임했다.
모교의 교사가 된 이종헌은 남달리 애교심과 사명의식이 투철하여 후진 교육에 최선을 다하였음으로 학교는 나날이 발전해 갔다.
그후 광영학교 교장으로 취임한 이종헌은 대한독립결사단을 조직하고 단장이 되어 조국광복을 위해 활동을 하여 오던 중 마침내 1919년 3월 1일 천지를 진동시킨 독립만세 의거가 일어나자, 이종헌은 이에 합세하여 3월 6일 서산읍 야소교회(耶蘇敎會)와 천도교회가 중심이 되어 독립만세를 부르니 순식간에 수 천명이 운집하여 대시위를 폈다.
이같은 군민의 대시위에 용기를 얻은 이종헌 교장은, 교직원 학생 그리고 애국청년들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더불어 만세 3창을 소리높이 불렀다. 대시위를 전개한 이종헌은 조국광복을 확신하고, 이에 따라 대한독립결사단 운영에도 가일층 헌신하였다.
또한 1919년 11월 평안남도에서 대한독립청년단 검거사건이 일어났는데, 이에 관련된 이종성(李鐘聲)이 대한독립단 수령 윤종정(尹宗楨)의 지시를 받고 황해도·경기도·충청남도 등지를 왕래하며 활약하던 중, 마침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재무관 한태국(韓泰國)·서병철(徐丙轍)을 만나 힘을 합치게 되었다.
이리하여 서병철은 자기 고향인 서산 해미에 내려와 대한독립단 서산지단을 조직하고 앞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 해줄 것을 이종성에게 의뢰한바 그는 이에 동조하여, 밀령을 받고 안면읍에 내려와 이종헌 교장을 만나게 되었다.
밀령을 받은 이종헌은 애국적인 뜻이 서로 같으므로 앞으로 조국광복을 위해 신명을 받쳐 싸우기로 굳게 다짐하고 맹우(盟友)가 되었는데, 이때 이종헌은 대한독립단 서산지단장에 추대되었다.
서산지단장이 된 이종헌은 이보다 먼저 조직한 대한독립결사단과 하나가 되어, 교육사업을 통해 애국사상을 고취시키고, 또한 독립투사 양성을 위해 뜻있는 동지들을 규합키로 결심하고 동분서주 뛰어다녔다.
이종헌은 적극적인 애국활동의 실천과 독립운동 자금조달의 목표 달성을 꾀하기 위해, 가재창(買在昌)·오몽근(吳夢외)·임정호(林楨鎬)·염성환(廉星煥)·편무연(片茂捐)·이재국(李在國)·박준용(朴準用)·박봉래(朴鳳來) 등을 단원으로 가입시키는 한편, 태안·부석·남면 등 서산 일대의 애국지사 들을 순방하여 대한독립단에 가입할 것을 권유하는 동시에, 군자금을 모금하여 상해 임시정부 재무관인 서병철 등에 전달하였다.
이렇게 적극적으로 독립단 활동에 심혈을 쏟은 이종헌은, 마침내 일경(日本譽察)에 체포되어 잔인한 고문을 받았던 것이다.
이종헌은 공주법원에서 2년 6월의 언도를 받았으나 이에 항소하여 마침내 경성복심법원(京城覆審法浣)에서 재판을 받던 중 검사가 원심에 승복하기를 권하자, 이종헌은 손에 찬 쇠고랑으로 책상을 치며, 「왜 본인의 항소권을 막는가」 하며 고함을 지르니 법정이 매우 소란했었다.
검사는 이에 대노(大怒)하여 즉석에서 9년을 구형하니, 판사도 이에 동조하여 4년형을 언도함으로서, 마침내 이종헌은 서대문형무소에서 4년간 옥고를 치루어야 했다.
4년간 옥고를 치루고 출옥한 이종헌은 나라 사랑에 대한 마음 조금도 변함 없이 오히려 불타고 있었으니, 일본관헌은 그를 고등 요시찰 인물로 지목하고 계속 감시해 왔다.
그러나 이종헌은 다시 교육사업에 전력을 쏟으며 한 편으로는, 은밀히 화수회·시제·대동계 등의 명목으로 조국광복을 위해 일해오다 드디어 1945년 8월 15일 조국의 광복을 맞이하게 되었다.
조국광복과 더불어 1948년 합법적인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니 이에따라 안면면 초대 면장으로 이종헌이 추대되어 면민 복지증진에 주력하여 오다, 마침내 1957년 6월 18일 타계하니 향년 67세였다.
이같이 일생 동안 나라 사랑에 몸받쳐 온 그의 고귀한 뜻은 영원히 빛날 것이다. 지난 1977년 12월 13일 대한독립 유공자로 대통령의 표창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