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굴포운하」란 천수만(淺水灣)과 연접해 있는 태안읍 인평리와 그리고 가로림만(加露林灣)과 연접해 있는 팔봉면 어송리와의 약 7㎞에 이르는 거리를 개착(開鑿)하여 운하를 건설함으로서 그 명칭을 굴포운하라고 호칭하려 했던 것이다.
즉 천수만과 가로림만을 연결하는 운하를 일컫는 것이다.
고려(高麗)의 인종(仁宗)12년 (1134)에 착공하여 조선조(朝鮮朝)의 현종(顯宗)10년(1669)까지 무려 530여년간 계속 되었지만 결국 개통을 보지 못하고 중단 되었다.
물론 이 공사가 지속적으로 530여년간 계속된 것이 아니라, 사회적 변화에 따라 단속적(斷續的)으로 무려 10여차례에 걸쳐 작업을 실시하였다.
연인원 수만명의 군정(軍丁)을 동원하여 작업을 실시하였으나, 밑에 암반(岩盤)이 깔려 있고 또는 조수(潮水)가 밀려오면 허물어지곤 하여 마침내 공사를 중단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날과 같이 중장비(重裝備)가 없었던 당시의 이같은 대공사를 순전히 인력에 의해 해결 할려고 했던 것은 시작부터가 큰 잘못이었는지도 모른다.
결국 온길이(全長) 7㎞중 4㎞만 개착이 되고 나머지 3㎞는 완성을 보지 못했다. 이같이 운하는 완성되지 못했으나 그 대신 천수만 쪽의 태안읍 평천리에 창고(南倉)를 짓고, 또 가로림만 쪽의 구도(舊島)에도 창고(北倉)를 지어 세곡선(稅穀船)이 안흥량(安輿梁)을 거치지 않고 직접 천수만으로 들어와 세곡을 남창에 입고(入庫)시켜 놓으면, 여기서 다시 육로(陸路)로 운반시켜 북창에 입고시키곤 하였다.
이렇게 해서 북창에 옮겨진 세곡은 여기서 다시 배에 실리어(船績) 서울로 운반되었으나, 여기에도 많은 문제점이 뒤따라 마침내 이 방법도 오래가지 못하고 중단 되었다.
이 굴포운하를 만들려고 한 것은 삼남지방(三南地方)의 세곡(稅穀)을 서울로 조운(조運)함에 있어 수 십척의 선단(船團)이 반드시 태안반도의 안흥량을 통과해야만 하는데, 이 안흥량의 수로(水路)가 매우 험난하고 또한 암초(賠礁)가 많아서 선박이 이곳에서 파선되고 침몰하는 사고가 자주 일어남으로 이를 방지하고 따라서 서울까지의 항해 시간을 단축시키고자 이 굴포운하 건설을 계획됐던 것이다.
굴포운하가 건설이 되면 안흥량을 거치지 않고 천수만을 통과하여 가로림만을 지나 서울에 이르게 되므로 항해 시간이 1/3정도 단축되고 아울러 안전 항해가 되는 것이니 일거양득의 소득을 올리는 셈이었다.
오늘날과 같이 항해술이 발달되지 못하고 또 동력선(動力船)이 아닌 범선(돛단배)으로 연간 평균 200여 만석이 넘는 삼남 지역의 세곡을 조운(漕運)한다고 하는 것은 여간 큰 일이 아니었다.
특히 세곡 조운의 수로 중에서 제일 험난한 곳이 전국에서 3군데 있었는데, 태안반도의 안흥량, 강화도의 손돌목, 장연의 장산곶이다. 이 중에서도 유별나게 안흥량의 해로(海路)가 가장 험악해서 당시의 선원들은 이 삼남 지역의 조운 선단에 승선함을 꺼려할 정도였다고 한다.
조선조(朝鮮朝)의 태조(太祖)4년에서 제7대 세조(世祖) 1년에 이르기까지 60년간에 안흥량에서 일어난 사고의 통계를 보면 파선 및 침물된 선박 수가 무려 200척 인명 피해 1,200여명 사망, 그리고 미곡 손실 15,800석이었다.
연 월 일 | 선 단별 | 선박수 | 인적피해 | 비고 |
---|---|---|---|---|
태조 4년(1395) 5월 | 경상도 조운선 | 16척. 난파 | - | - |
태종 3년(1403) 5월 | " | 34척. 침몰 | - | - |
태종 3년(1403) 6월 | " | 30척 침몰 | 천명 사망 | 미곡 일만석 수장 |
태종14년(1414) 8월 | 전라도 조운선 | 66척. 침몰 | - | 미곡 5,800석 수장 |
세조 1년(1455) | " | 54척. 침몰 | - | - |
이해를 돕기 위해 신증동국여지승람의 태안군 산천조(山川條)에 있는 굴포의 기사를 전재한다.
조선조(朝鮮朝)의 중종(中宗) 25년(1530)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위와 같은 내용만 수록되어 있는데 반하여 조선조의 고종(高宗) 9년(1872)에 간행된 태안읍지(泰安邑誌)에는 앞의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사에 이어 계속 다음과 같이 쓰여져 있다.
「"""康熙歲戊申顯宗駕行溫川時沔川士人李勤上疏陳其更鑿之意而否則築率北翕以인蜀瀋運之路 朝廷遣雪臣第其難鑿之勢然後卽設南北倉兩倉相잡十里許兩率潛悅륜納於南倉以車牛轉輪北니居行之數年亦多弊立참還爲廢棄」
현재 굴포운하의 유허지(遺墟地)로 남아 있는 지역(태안읍 인평리에서 팔봉면 어송리까지)을 실측(實測)해 본 결과 밑바닥이 제일 좁은 곳은 14m이고, 위 부분의 제일 넓은 곳은 63m였다.
실측 방법은 100m 거리로 모두 7개 구간을 설정하여 상하층의 넓이와 높이를 재어 보았는데, 밑바닥이 제일 좁은 곳은 어송리를 향해 300m 지점이고, 또한 제일 넓은 곳은 700m 지점인 24m였고 , 상층부는 제일 넓은 지역이 역시 700m지점으로 65m이고, 또한 제일 좁은 곳은 유허지 입구인 인평리 3구로 35m였다.
이를 평균해 보면 밑바닥의 넓이는 약 19m이고 상층부의 넓이는 52m이며, 높이는 제일 낮은 곳이 3m이고 또한 제일 높은 곳은 50m였는데 이를 도표로 보면 다음과 같다.
굴포운하가 완공되지 못해 활용할 수는 없었으나, 세계 최초의 운하 건설을 시도 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한민족의 긍지를 과시해 볼만하다.
「스에즈운하」는 총길이 160㎞인데 1869년에 건설되었으며,「파나마운하」는 길이 82㎞인데, 1914년에 건설되었다.
이 의항운하의 개착지는 만리포행 국도를 따라 가다 소원면 송현리 동구(洞 口)에서 바른쪽으로 접어들어 의항행 차도로 약 1.5㎞쯤 가면 마을회관에 이르게 되는데, 이 회관앞의 무네미재를 지나 송현저수지에 이르는 구간을 운하유적지라고 한다.
「무네미재」란 지명도 이곳에 운하가 착통되면 이 고개로 물이 넘어온다 해서 붙여진 명칭이다.
이 곳에 운하건설을 시도한 것은 앞에서 거론한「굴포운하」의 공사가 매우어려움에 부딛쳐서 부득이 이를 중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조운선(漕運船)의 사고는 여전히 계속되므로 제2의 운하 굴착지를 물색 해야만 했다.
거리도 짧고 비교적 암반이 없는 지리적 조건이 양호한 곳을 물색하던중 송현리가 가장 적지(適地)임을 알았다.
그리하여 조선조(朝鮮朝)의 중종(中宗) 16년(1521)에 무려 3,000여명의 군정(軍丁)을 동원하여 공사를 착수하였다. 그 후 단속적인 공사이기는 했지만 1537년(중종 32)에 일단 완성을 보았었다. 하지만 결국 파놓은 곳이 허물어지고 막혀서 통선(通船)을 해보지 못한 채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로 인해 다시 굴포운하의 중단했던 공사를 실시했으나 결국은 모두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 판목이란 안면읍 창기리와 남면의 신온리와의 접경을 인공적으로 절단해 놓은 곳을 일컫는 것인데, 이 판목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섬(島)이 아닌 안면곶(安眠串)으로 불리워졌다.
이곳을 자르게된 동기는 안면외해(安眠外海)인 안흥량을 통과하여 서울로 가는 삼남 지역의 세곡선(稅穀船)이 이곳에서 대부분의 선단이 해난(海難) 사고 당하게 되므로 이로 인해 많은 인명 피해와 막대한 세곡의 손실을 가져오게 되었던 것이다.
이같은 사실을 알고 있던 태안군의 향리(鄕吏) 방경잠(房景岑)이 감영(監營)에 헌의(獻議)함으로서 조선조(朝鮮朝)의 인조(仁祖) 때 김유(金流) 영의정(領相)이 이곳을 굴착(掘鑿)케 한 것이다.
이같이 조선조(朝鮮朝)의 인조(1623~1649) 때 착통되었다고는 하나 정확한 연도는 미상이다. 그러나 김유의 영의정 재직중이라 하였으니 여기서 고찰해 볼 필요가 있는데, 문제는 영의정 직을 한번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무려 3회에 걸쳐 중임(重任)하였으니 어느 시기인지 분명치 않다.
김유가 최초로 영의정이 되는 것은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난 인조(仁祖) 14년(1636)인데, 이듬해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환도(還都)한 뒤에 화의진소(和議棟疏) 문제로 말미암아 삭직(削職) 당함으로서 영의정 취임 3개여월만에 파직된 것이다.
이렇게 병자호란 등으로 인하여 국내 정세가 매우 불안한 시기에 국토 개발에 대한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 후 7년 뒤인 1644년에 심기원(沈器遠)의 모역(謀逆) 사건을 신속하게 평정함으로서 그 공로를 인정 받아 다시 영의정에 취임 하였으나, 이듬해에 신병으로 인하여 삭직을 당했다.
이 시기에도 비록 영의정에 재직중이었다고는 하지만, 시간적으로 보나 또는 건강 상태 등으로 미루어 보아 역시 국토 개발에 대한 여유가 없었을 것이 자명하다.
그러나 다행히도 김유는 건강이 회복되어 같은 해(1645)에 다시 영의정에 복직(復職)하여 1647년까지 재직하였으므로 비교적 이 때는 사회적으로 안정된 시기이며, 또한 김유의 말년이었으니 이 무렵에「안면도판목」이 굴착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즉 인조(仁祖)23년에서 25년 사이(1645~1647)에 판목이 착통(鑿通)된 것으로 보는 것이 가장 합리적일 것 같다.
이해를 돕기 위해 1872년에 간행된「태안읍지」의 고적조(古跡條) 안면곶(安眠串)에 대한 기사를 소개 한다.
「安眠串 在府南五十里諺博士亭李之函愛賞山勢庵留數日乃曰此地後必有鑿暎通者果有本府鄕吏房景岑獻議于監營鑿來暎通其水道今爲一島松木茂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