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망해루는 근흥면 정죽리의 안흥항 입구에 축성된 안흥성내 태국사 옆에 세웠던 누각을 일컫는 것이다.
이 망해루는 그 명칭이 말해주듯이 멀리 해상의 절경을 조망(眺望)할 수 있고 아울러 해구(海寇)의 침입을 감시 할 수 있는 역할을 담당하여 왔으나, 안흥성의 폐성과 더불어 자연히 허물어지고 말았다.
태국사에서 남쪽으로 약 100여미터 지점에 망해루 터가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는데, 잡초 속을 헤치고 살펴보면 주춧돌이 덩그렇게 나타난다.
이 제승루는 근흥면 정죽리에 설치되었던 안흥진(安興鎭)의 객사봉(客舍峰) 남쪽에 세웠던 누각을 일컫는 것이다.
이 제승루에 오르면 전후 좌우가 탁 트여서 사방을 조망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위치에 있었으므로 이곳을 찾는 탐승객(探勝客)들이 사계(四季)를 통해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이 제승루는 고려 공민왕 원년(1352)에 안흥지역에 침입한 왜적선(倭寂船을 김휘남(金暉南)이 격침시키고 포획(補獲)한 승리의 기념으로 세운 망루(望樓)였는데, 안흥성 폐성과 더불어 허물어지고 말았다.
지금은 그 터만 쓸쓸하게 남아 있어 역사의 흐름을 실감케 한다.
이 망월루는 태안읍성내 동문 옆에 세웠던 누각인데, 그 명칭이 말해주듯이보름날 저녁이면 선비들이 이 누각에 올라 만월을 바라보며 경승(景勝)을 노래하고 시름을 달랬다고 한다.
이 망월루는 동학혁명(1894) 때 불타 버렸는데, 지금은 그 흔적조차 알 수 없이 모두 주택가로 변모하고 말았다.
이 사락정은 태안읍 남문리의 현 차부 근처에 세워졌었다고 전하나 허물어진지 이미 오래되어, 지금은 그 흔적조차 알 수 없으며 따라서 창건 연대와 규모도 미상(未詳)이다.
그러나 사락정 개작학교기(思樂亭改作學校記)에 의하면 최익수 군수(崔益秀郡守)가 창건(創建)하여 이곳에서 활을 쏘았는데, 그 후 송관화(宋觀和) 군수가 이를 중수하여 사용하여 오다, 태안군민의 교육을 위해 태안읍 남문리 환동에 거주하던 이희열(李希烈)의 특별한 성의로 사락정을 교실로 개조하고 증축하여 화양의숙(華陽義塾)의 발전을 도모했다.
화양의숙은 나날이 발전하여 그 명성이 널리 알려지게 되자 인근 각지에서 많은 학생들이 모여들어 더욱 알차게 벋어나갔으나 마침내 일제(日帝)의 탄압에 의해 1911년 태안공립보통학교로 개편 되었다.
그 뒤 태안국민학교가 오늘의 장소로 옮겨지고 1922년에 이 건물은 개인에게 매도되었다. 이렇게 개인에게 넘어간 본래의 사락정 건물이 언제 없어졌는지 알수 없으나, 1922년까지는 이 건물이 분명히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사락정기(思樂亭記)를 소개 한다.
이 경이정은 태안읍 동문리의 태안 읍사무소 앞에 자리하고 있는데, 조선조(朝鮮朝) 정종(定宗) 원년(1399)에 세워진 순한국식 누각형(樓閣形)의 목조와즙(木주瓦葺) 건물이다.
경이정은 태안방어사(泰安防禦使)가 군무 집행(軍務執行)을 수행하던 곳이며, 때로는 증국(明) 사신이 안흥항을 거쳐 입조(入朝) 내왕할 때 이 경이정에서 쉬어가곤 하였다.
또한 매년 정월 보름날 밤에는 주민의 안과 태평(安過泰平)을 비는 재우제(宰牛祭)를 거행하는데, 이 때는 방어사가 반드시 참제(參祭)해야 한다.
이렇게 방어사의 참제와 더불어 흥겨운 주악이 울려피지면 재우제의 분위기는 고조되면서 성대하게 진행되는데, 제수로는 소를 잡아 통째로 쓰는 것이 재우제의 특징 이었다.
이렇게 거행해 오던 재우제는 대한제국 융희 원년(1907)에 중단 되었으며, 그후 이 경이정 건물은 일본 강점기(日本强占期)인 1925년 7월부터 1927년 6월까지 만 2년간 태안읍 주민의 야학용(夜學用)으로 사용되었다.
그동안 틈틈이 경로당으로 사용되어 왔으나 보수하지 않아 퇴락(頹落) 직전에 놓여 있던 것을 지난 1988년에 중수하고 단청하여 이젠 새로운 면모를 갖추어 놓았다.
그런데 문제는 이 경이정(憬夷亭)이란 현판의「憬夷」란 두 글자가 내포하고 있는 의미가 무엇인가 여기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것이다.
한자(漢字)는 표의문자(表意文字)이므로 한 글자에도 여러가지 뜻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들이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이「憬」과「夷」자도 예외가 아니어서「憬」은 ①깨닫다(覺悟) ②멀다(遠也.遠行貌) ③넓고 크다(廣大也)의 뜻이 있고「夷」는 ①동방군자국의 사람(東方君子國之人也) ②동방의 오랑캐(東夷也) ③평탄하다(平也) ④쉽다(易也) ⑤기쁘다(憘也) ⑥상처(傷也) ⑦크다(大也) ⑧공경하다(敬也) ⑨맑다(明也) ⑩성(夷氏) ⑪아우(弟也) ⑫어질다(仁也) 등등 무려 32가지의 뜻을 지니고 있다.
이같이 많은 뜻 가운데서 과연 어느 것이 가장 적합한 것인가, 여기서 일반적으로 흔히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이「憬」자를「상대를 그리워 애틋하게 생각한다」는 뜻의 동경(憧憬)을 연상하고, 또한「夷」자는 동방 오랑캐를 생각하게 됨으로서 자연히 이 경이정(憬夷亭)을 즉흥적으로 오랑캐를 동경 한다는 식의 자의적인 해석을 하게 된다.
이같은 선입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현판을 대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왜 이러한 현판을 그대로 붙여 놓았느냐고 반문한다. 또한 지난 1987년도 부임한 서산의 모군수는 이 불쾌한 현판을 제거하라는 지시까지 했었다고 하니, 이 경이정이 풍기는 이미지는 그렇게 좋은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러나 이 경이정을 세운 지난날의 우리 선인들이 그렇게 몰지각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이 경이(憬夷)가 내포하고 있는 의미는 매우 함축성(含蓄性)이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한국8도강산명승지지」란 책자에 따르면 憬夷를「憬字遙遠也夷字平安也使臣遠路渡江之地平行之意也」라 하여「憬」을 요원「夷」자를 평안으로 보고「사신들의 원로 도강의 평안함」을 뜻하는 것으로 풀이하는 것 같은데, 실은 여기에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1982년에 간행된 서산군지에 이 내용을 그대로 답습 했으나, 그 뒤 여러 측면에서 이를 살피고 조사한 결과 설득력이 없음을 깨닫고 여기에「경이」의 뜻을 수정하여 둔다.
앞에서도「憬과 夷」자가 내포하고 있는 그 뜻을 명기 했지만「憬」자에는 요원의 뜻은 없고, 다만 원.원행(遠也.遠行)의 뜻과,「夷」자 역시 평안이란 뜻은 없고 평탄하다(平也)의 뜻이 있다. 요원과 원행, 평안과 평탄은 그 뜻이 다르다.
이 경이(憬夷)란 단어는, 시경(詩經)의 노송 반수(詩魯頌泮水)의 경피회이(憬彼淮夷)에서 온 준 말로서, 저 회이(淮夷)를 깨달으라는 말이다. 즉, 오랑캐를 경계하라는 뜻이다.
회이(淮夷)는 동이(東夷)의 명칭으로서 회전(會箋)에 따르면「16年傳謂之東略是淮夷在東國也 准南北近海之地皆爲准夷」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중국에서 일컫는 오랑캐와 우리 나라에서 말하는 오랑캐는 그 성격이 다르다. 중국에서는 도성(都城)의 4대문 밖에 있는 것은 모두 오랑캐로 지청했다. 동이(東夷)·서융(西戎)·남만(南蠻)·북적(北狄)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우리 나라에서 말하는 오랑캐(夷狄)는 고려 말엽에서 조선조 초기에 걸쳐 두만강 부근과 그 북쪽에 살던 여진(女眞)의 미개한 부족 그리고 중국의 북방 민족(胡族)과 일본(日本) 그리고 서양(西洋)까지를 포함하여 미개하고 예의 범절이 갖추어지지 않은 민족을 통틀어 오랑캐라고 호칭 하였다.
14세기 중엽인 고려 말기서부터 조선조 초기에 걸쳐 침입해 온 왜구(倭寇)로 인하여 태안 군민이 겪은 수모는 형언할 수 없었다. 특히 1373년에는 왜구의 침입으로 인해 태안군이 폐군되었으며, 그 뒤 조선조의 성종 10년(1479)에는 경상도 의성에서 국조인 단군 영정을 태안으로 이안하여 국조신의 영험으로 침입해 들어오는 오랑캐를 막으려 하였던 것이다.
이같이 외적의 침입이 심한 취약 지역(腺弱地域)인 태안에 방어사의 군무수행에 필요한 건물을 짓고 여기에 경이정(景夷亭)이란 현판을 붙인 것은, 다시는 전과 같은 왜구의 침입으로 인해 군이 폐군되는 일이 없도록 엄중히 오랑캐를 경계하라는 뜻에서 이같은「경이정」의 명칭을 붙인 것이다.
애당초 중국(中國)의 사신(使臣)을 맞이하기 위해 지은 건물이 아니라, 그 뒤 중국 사신이 안흥항(安與港)을 통해 입조(入朝) 내왕할 때 잠시 쉬어가는 휴식처로 제공 하였을 뿐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조희천(趙羲天)이 쓴 경이정 중수상량문을 옮겨 적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