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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소근포진성(所斤浦鎭城) 2016-11-21
이 소근포진성은 소원면 소근리(所遠面所斤里)의 해안가에 자리하고 있는데, 조선조(朝鮮朝)의 중종(中宗) 9년(1514)에 축조(築造)된 석성(石城)으로서 그 둘레는 656미터이며 높이는 3.3미터이다.
이곳에 축성하게 된 동기는 침입해 오는 외적을 막기 위해서였다. 특히 고려말기(高麗末期)부터 더욱 심하게 나타난 왜구(倭寇)로 인하여 연안(沿岸)의 주민들이 약탈(掠奪)을 당하고 심지어 피살(被殺)되는 등 그 참상(慘狀)은 형언할 수 없었다.
고려(高麗)의 31대 공민왕(恭愍王) 22년(1373)에는 왜구의 침입이 몹시 혹독 하여 태안 군수가 겨우 한 두명의 아전을 데리고 서산군에 붙임으로서 결국은 태안군이 폐군의 비운을 맞게 되었다.
왜구의 침입으로 말미암아 하나의 군이 폐군되었다고 하는 것은, 그들의 침략상(侵掠狀)이 잔악(殘惡)하였음을 여실히 입증해 주고 있는 것이다.
태안군이 폐군된지 무려 66년 뒤인 세종(世宗) 21년(1439)에 새 공관(公館)을 짓고 김흔지(金炘之) 군수가 부임 하였다.
그후 75년에 소근포진성이 축성 되는데, 이는 태안군이 폐군된지 무려 141년 뒤에 이루어진 것으로서 해적(倭寇)의 방어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고려 말기인 1350년대 초기부터 1380년대 중엽까지 무려 10여회에 걸쳐 왜구의 침입을 받은 것이다.
이 소근포진성은 당시의 유일한 태안군의 진성으로서 외적 방어에 최선을 다하여 오다, 1894년 동학혁명 때 폐성 되었다.
현재 성벽(城壁) 일부만 남아있고 또한 성내에는 대여섯 채의 민가(民家)가 지난날의 역사의 흔적을 외면한채 한가롭게 들어서 있다.
그리고 이 소근포진성은 소근포에 축성된 성이므로 편의상 소근포란 지명을 붙이어 그대로 소근포진성이라 호칭하였는데, 시간의 흐름에 따라 주민들 사이에선, 이를 줄여서 통칭 소근진성 또는 소근성이라고 한다.
1. 안흥진성(安興鎭城) 2016-11-21
안흥진성은 근흥면 정죽리에 자리하고 있는데, 조선조(朝鮮朝)의 제17대 효종(孝宗) 6년(1655)에 축성(築城)된 것이다. 
축성 목적은 국토 방위였으나, 이곳에 축성하게 된 동기를 살펴보면, 경기사인(京畿士人) 김석견(金石堅)이 군왕(君王)께 상소하여 안흥진성의 축조를 청원하니, 군왕께서 직접 지경연사(知經筵事)인 이후원(李厚源)을 불러 안흥진성 축조의 필요성을 하문(下問)하였다.
이에 이후원은 주저치 않고 이곳의 지형이 해중(海中)으로 약 10여리쫌 돌출하여 있는 천연적인 요충지(要衝地)이므로, 이곳에 석성(石城)을 축조하여 군대를 주둔시키고 호서(湖西)의 양곡(糧穀)을 비축(備蓄)하여 두면 안으로는 강도(江都)의 표리(表裏)가 되고, 밖으로는 호령(湖嶺) 지역을 공제(控制)할 것이라고 진언(進言) 하였다.
이 말을 들은 군왕께서는 즉시 충청감사(忠淸監司)에게 하명하여 안흥진성을 축조케 하니, 태안(泰安)을 비롯하여 인근의 서령(瑞寧) 해미(海美) 덕산(德山) 예산(禮山) 당진(唐津) 면천(沔川) 홍주(洪州) 결성(結城) 보령(保寧) 남포(藍浦) 서천(舒川) 한산(韓山) 임천(林川) 홍산(鴻山) 청양(靑場) 청주(淸州) 충주(忠州) 등지(等地)의 18개 읍민(邑民)이 이에 동원 되었다.
이같은 과정을 거쳐 무려 10여년만에 축성된 안흥진성(安興鎭城)은 240년간 내려오다, 조선조(朝鮮朝)의 고종(高宗) 31년(1894) 동학혁명(東學革命)때 성내(城內)의 건물이 일부 타버리고, 이에 따라 성곽은 자연히 폐성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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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 2024-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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